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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와 기공소

by 민주선 posted May 1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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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라는 단어를 보면 뭔가 계속 불행한 일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저주가 있을까요? 


저주의 반대말은 "복"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복을 받기를 원하지만 저주 받을 생각은 하기 싫지요. 

세상은 노력한대로 성과를 줄까요? 

또한 우리는 평등을 원하고 있지만 평등한 세상이 있나요? 


오늘 놀이터에서 딸이 노는데 어떤 남자 꼬마 아이의 눈이 이상해 보였습니다. 

다시한번 보니 눈의 검은 동자가 모두 가운데로 모여있었습니다. 안구 근육의 문제이겠지요.

짧은 순간이였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앉고 미끄럼틀에 올려주는 모습을 보았지요. 

그 아이의 아버지도 제가 아이를 보았다는 것을 의식한 듯했습니다. 

사실 1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이지만 그 아이의 아버지는 그런 시선들을 많이 의식했었기에 

금방 분위기를 알고 아이를 안은 것이였습니다. 


왜 어떤 아이들은 약간 불편하게 태어나게 되는 걸까? 본인의 잘못도 부모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우리의 현실속에서는 아직도 많은 불평등함이 존재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말이죠. 


인도에서는 대대로 빨래만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아들... 어린아이들은 태어나서 자라며 

미래의 빨래꾼입니다...


빨래터.jpg

 -인터넷에서 퍼온 사진- 


인도의 카스트 신분제도는 아직까지 남아있으며 이들은 최하위 "수드라"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불가촉 천민"에 속합니다.

이들과 접촉되면 현재도 부정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빨래터는 직장이고 빨래꾼은 직업입니다. 그리고 모두들 죽을때 까지 성실히 일만 하다가 

고생을 대물림을 해주게 됩니다. 사람은 성실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일을 시킬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힘들어도 자발적으로 계속합니다. 


힘들어도 자발적으로 계속해서 일을하는 이유는 이들의 "윤회 사상" 때문입니다.

그들의 아버지들은 자신들이 일을 성실히 해야만 다음 생에 더 낳은 계급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도 믿는 윤회사상은 사실 인도-유럽계통인 아리안족이 원주민을 정복하고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제도입니다. 즉, 반발을 하지 못하게하고 다음 생의 소망을 상기시키며 기존의 하던 것을 성실히 시키기 위한 

상전의 노예 부리기 제도입니다. 

한 잡지에서 한 가정이 그 지긋지긋한 빨래일이 싫어서 모두 타국으로 탈출을 시켰는데 막상 타국에서 다시 아이들과 부모 모두

채석장에서 하루종일 노동을 하는 상황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불행의 반복이지요.. 


우리도 알게 모르게 갖혀져 있고 닫혀있는 생각이 있습니다. 


저주는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생각의 고정화" 입니다.  사람의 나이가 많을 수록 생각은 고정화 됩니다. 


빨래터의 사람들 처럼 기공소의 우리들도 어쩌면 생각이 고정화 되어있는지 모릅니다. 

특히 오래된 기공사 일수록.. 또한 빨래터의 기술과 노하우가 많을 수록.. 우리의 임상 아날로그의 테크닉이 뛰어날수록 

고정화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빨래터의 사람들이 접하는 정보는 한계성이 있습니다. 우리 또한 지난 수십년간 밀실공방 테크닉이였고 최근에 인터넷으로 

외부정보를 알았습니다.  그 환경에 다시 자녀들을 넣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치아를 만드는 일은 의미가 있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빨래는요?  당연히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깨끗하게 해주잖아요. 


빨래의 주문을 맡기는 사람들은 빨래가 아주 잘되었다고 깨끗하다고 칭찬을 해줍니다. 보너스도 더 줍니다. 

빨래터의 사람들은 기분이 우쭐하고 몇푼 더 받은 돈으로 가족에게 자랑하고 자랑스러워합니다. 


세월이 흘러서 한 빨래꾼이 LG고성능 세탁기를  들여왔습니다.  힘이 덜 들어 갔습니다.

처리양도 더 늘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니 많은 사람들이 세탁기를 들여왔습니다. 

아직 접하지 못하고 손으로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현상에서 그들의 삶이 더 나아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여전히 빨래터 안에서 이전보다 더 많은 일을 

처리해야만 생존할수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빨래 조금 잘하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공소, 기공실에서 치아를 잘 만들어도 여전히 "기공사"라는 프레임에 갖혀 있습니다. 

만약 "기공사"라는 브렌드 가치가 없다면 이것은 신분제도의 불가촉 천민과 다를바 없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치과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무사가 기공사를 무시하는 것처럼요. 


빨래는 하되 빨래꾼의 마인드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이젠 자식들이 빨래를 안하겠다고 하고 있으니까요..

공부해서 노예신분을 살 이유라도 있나요?  


소망이 없는 곳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망이 있다면 빨래터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두들... 힘내시고요 새로운 세상을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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